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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브랜드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재도약하는 브랜드들을 관찰하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유수의 매체들과 플랫폼, 그리고 글로벌 SPA 기업들도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함께 리브랜딩을 거친 브랜드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요. 명민한 감각으로 떠오르는 브랜드를 잡아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주특기죠. H&M과 라반(Rabbane)의 협업은 최근에 일어난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컬래버레이션 발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알고 있는 파코 라반인가?' 싶었을 정도로 궁금증을 자아냈어요. 그리고 라반을 검색해보게 됩니다. 잊고 있던 파코 라반(Paco Rabanne)이 라반으로 리브랜딩을 거쳤다는 걸 알게 되죠.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파코 라반은 활동명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프란시스코 라바네다 쿠에르보(Francisco Rabaneda Cuervo)입니다. 1934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죠. 스페인 내전에서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발렌시아가의 수석 재봉사였던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졌어요. 혼란스러운 스페인의 사회적 상황을 피해 1937년 바스크에서 프랑스 파리로 하우스를 옮긴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를 따라, 1939년 파코 라반 가족도 프랑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파코 라반은 어머니로부터 자연스럽게 패션에 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파리 국립 장식 예술 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 입학해 건축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1960년대 전후 당시 건축 및 예술계에서 진행되었던 혁신적인 실험들을 경험하게 되죠. 특히 추후 그의 커리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새로운 소재와 기술에 대한 도전 정신, 그리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기릅니다.
패션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죠. 디올과 지방시, 그리고 당시 저명한 슈즈 브랜드였던 찰스 주르댕(Charles Jourdan)에 스케치 일러스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렌시아가, 앙드레 꾸레쥬, 피에르 가르뎅 등 쿠튀르 하우스를 위해 커스텀 주얼리를 제작했는데 1965년 '로도이드(Rhodoid)'라 불리는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의 액세서리가 성공적인 반응을 보이며 단숨에 그를 떠오르는 신진 디자이너로 만들었어요. 이에 힘입어 동일한 재료와 기법으로 만든 옷들은 <보그>에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를 대체할 새로운 종류의 의상'이라 소개되며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만듭니다.
파코 라반 하우스의 시작
1966년 2월 1일, 파코라반은 파리에 위치한 조르주 5세 호텔에서 자신의 첫번째 컬렉션을 론칭합니다. 주제는 ‘새로운 현대적 재료들을 사용해 만든 입을 수 없는 의상 12벌(Manifesto: 12 Unwearable Dresses Made of Contemporary Materials)’. 로도이드 플라스틱은 물론, 금속과 종이 등 기존 쿠튀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소재들을 접목한, 신선하고 충격적인 컬렉션이었죠. 값비싼 소재와 휘황찬란한 디테일이 특징이었던 파리 쿠틔르의 전통을 깨뜨린 그를 다수의 언론들은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범상치 않은 사고와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아이)'로 부르며 천재적인 디자이너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의 작업 방식은 다른 쿠튀리에들과는 사뭇 달랐어요. 원단이나 가죽, 실과 바늘을 손에 든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파코 라반은 금속판과 플라스틱 조각, 망치와 펜치 그리고 절단기를 손에 들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얇은 플라스틱 혹은 철제 원형 디스크 조각에 구멍을 뚫어 서로 연결해 드레스를 만들거나, 중세시대 기사들이 입었던 쇠사슬 갑옷을 떠오르게 하는 체인메일(chain mail) 드레스를 제작하는 등 독창적인 제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였습니다.
코코 샤넬은 그를 '금속공(metalworker)'이라 부르며 비하했지만 자신이 쿠튀리에가 아니라 '장인'이라 불리길 원했던 파코 라반은 개의치 않았죠. 1967년 종이로 만든 드레스, 1968년 알루미늄 소재의 의상, 특수 몰딩 기법을 사용해 솔기가 없는 옷, PVC와 광섬유 등 다양한 소재를 접목한 의상을 선보이며 혁신적인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파리 오트쿠튀르 조합의 멤버로 승인 받았고, 1977년 황금 바늘상, 1990년 황금 골무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2010년에는 프랑스 패션에 기여한 공로로 최상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을 수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치열한 달 탐사 경쟁으로 인해 퓨처리즘과 우주 시대(Space-age) 룩이 유행과 맞물려 파코 라반은 트렌드를 선도하는 브랜드가 됩니다. 앙드레 꾸레쥬가 PVC 소재로 우주 시대를 표현했다면, 파코 라반은 금속과 플라스틱 조각으로 퓨처리즘을 표현한 셈이죠.
그의 전위적인 옷들은 특히 공상과학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요. 1968년 개봉한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영화 <바바렐라(Barbarella)>가 대표적이죠. 주인공인 배우 제인 폰다(Jane Seymour Fonda)가 미래 41세기의 우주 여전사 역할을 맡으며 착용한 초록색 드레스는 파코 라반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인 프랑스와즈 아르디(Francoise Madeleine Hardy)는 파코 라반의 뮤즈로서 그의 옷을 매우 사랑했다고 알려졌죠.
르 69백과 파코 라반 퍼퓸
1969년은 파코 라반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일 것입니다. 파코 라반의 시그니처 백인 '르 69백(Le 69 Bag)'과 인지도를 더욱 높여준 퍼퓸 라인이 탄생했기 때문이죠. 르 69백은 컬렉션 의상처럼 원형 디스크 형태의 작은 금속 조각들에 구멍을 뚫어 수많은 고리들로 연결해 완성한 가방입니다. 총 367개의 조각들을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엮어 내는 공정을 거치죠. 1960년대 프랑스의 아이돌이었던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Anne Marie Bardot)와 프랑스와즈 아르디가 애정하는 백으로 알려지며 당대의 핫한 백으로 떠올랐습니다. 2011년 런던 디자인 박물관이 출판한 책 <세상을 변화시킨 50개의 백(Fifty Bags That Changed the World)>에서 르 69백을 그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죠.
하지만 철제 조각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2011년 꼼 데 가르송의 창립자,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는 플라스틱 조각들로 이 백을 재해석한 버전을 제작합니다. 2019년에는 '1969백'으로 리론칭했으며 스틸보다 가벼운 알루미늄이나 브라스 소재를 적용했어요. 367개 조각의 오리지널 버전과 120개 조각의 미니 버전으로 출시했습니다.
1968년 파코 라반은 향수 회사인 푸이그(Puig) 그룹과 협업해 향수 사업에 뛰어듭니다. 이듬해인 1969년, 파코 라반의 처음이자 아이코닉한 향수, '칼란드르(Calandre)'가 탄생하죠. 세련되면서도 여성스러운 향수로 재스민, 은방울꽃, 장미, 백합 등의 풍성한 꽃 향기가 특징입니다. 1973년에는 첫 남성 향수인 '파코 라반 뿌르 옴므(Paco Rabanne Pour Homme)'를 출시했고, 1994년에는 남녀공용 향수인 'XS'과 여성용 'XS 뿌르 엘르(XS Pour Elle)'를 세상에 내놓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XS 시리즈를 확장했죠. 2008년 선보인 '파코 라반 원 밀리언(Paco Rabanne 1 Million)'은 블러드 만다린과 페퍼민트, 머스크 향이 조합된 향이 특징으로 현재까지 독보적인 남성 향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뉴 페이스, 줄리앙 도세나
어떠한 브랜드도 그렇듯, 파코 라반도 최정점을 찍은 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불황과 냉전으로 인해 보수적으로 변한 분위기, 그리고 1980년대 티에리 뮈글러와 장 폴 고티에가 선도한 파워 드레싱으로 인해 파코 라반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죠. 1986년 푸이그 그룹에 브랜드를 인수한 뒤, 1999년 7월 컬렉션 쇼를 끝으로 그는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가 패션계를 떠난 이후 다양한 디렉터가 파코 라반을 거쳐갔지만 모두 세 시즌 넘게 버티질 못했습니다. 2013년 가을, 생소한 디자이너가 파코 라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거론됩니다. 바로 줄리앙 도세나(Julien Dossena)라는 인물이었죠.
1982년 프랑스 브리타니 출생의 줄리앙 도세나는 저명한 아트 스쿨인 '라 캄브르(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visuels de La Cambre)'를 졸업하고 끌로에와 알렉산더 맥퀸을 거쳐 2008년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 팀에 합류합니다. 이곳에서 5년의 경력을 채운 뒤, 2012년 자신의 브랜드인 아토(Atto)를 론칭하죠. 단 한 번의 컬렉션으로 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3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파코 라반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그가 디렉터로서 데뷔한 2014년 S/S 컬렉션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파코 라반의 새로운 페르소나를 제시하는 게 목표라 밝혔던 그는 실버 데님 팬츠와 보머 재킷, 페이턴트 가죽 소재의 미니 드레스 등으로 웨어러블하지만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머금은 옷들을 선보였죠.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파코 라반의 컬렉션을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입을 수 있도록 재해석한 셈입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친숙함으로 각인시킨 후, 시간이 지나 브랜드의 전설적인 체인메일 드레스나 플라스틱 조각 드레스 등 아카이브에서 꺼낸듯한 의상들도 제시하며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져 나갔어요.
라반으로 불러주세요
89번째 생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올해 2월 3일, 안타깝게도 파코 라반은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은퇴 이후 자신이 신을 세 번 목격했고, 전생을 알고 있으며, 러시아 우주 정거장인 '미르(Mir)'가 파리에 떨어질 것이라는 등 기이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천재성과 패션업계에 이룬 업적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푸이그 그룹은 파코 라반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를 '과감하고 혁명적이며 도발적인 비전을 전파해온 사람'이라 표현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파코 라반이 '라반'으로 브랜드명을 변경했습니다. 입생로랑이 '생 로랑'으로, 크리스찬 디올이 '디올'로 브랜드명을 바꾸듯 창립자의 이름을 제외하며 간결하게 변하는 추세를 따른 것이죠. 변경된 라반의 브랜드 폰트는 첫 향수, 칼란드르의 글씨체에서 차용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라반의 첫 알파벳인 'R'을 활용한 로고와 모노그램 플레이도 엿볼 수 있죠. 뷰티 컬렉션에도 변화를 가미했습니다. 기존 향수만 다뤘던 라반은 메이크업 라인을 신설하며 본격적으로 변모된 브랜드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합니다.
가장 최근인 11월 9일에는 글로벌 SPA 브랜드인 H&M과의 협업 라인이 출시되었죠. 지난 5월 뮈글러와의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선보인 이후 올해만 두 번째 공개입니다. 당대의 핫한 브랜드와 협업하는 H&M이기에 라반의 리브랜딩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는데요. 줄리앙 도세나는 이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라반의 아방가르드한 에너지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급한 바 있죠. H&M 역시 파코 라반이 제작한 금속 소재의 드레스를 ‘패션 역사의 일부’라 칭하며 라반이 지닌 아카이브를 높이 평가했고요. 파코 라반이 아닌 라반이 제안하는 혁신과 도전정신은 21세기의 우리들을 또 어떻게 놀라게 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