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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펑크의 여왕, 영국 패션의 대모, 저항하는 괴짜, 늙지 않는 창조자 등 영국의 '힙'한 인물 원탑이라 할 수 있죠. 뛰어난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사회 운동가로서 패션 근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이 전설적인 인물은 MZ세대에게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요. 특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상징적인 로고 펜던트가 돋보이는 진주 목걸이는 젠지들 사이에서 핫한 아이템이 되었죠. 영국의 괴짜 할머니가 전세계의 증손주 뻘인 친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무엇일까요?
운명적인 만남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본명은 비비안 이사벨 스와이어(Vivienne Isabel Swire)입니다. 1941년 영국 더비셔에서 태어난 비비안은 소시지 공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과일 가게를 하던 어머니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죠. 16살, 런던 북부로 이사한 후 해로우 아트 스쿨에서 은세공을 배웠으나,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사범 학교로 진학,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비안은 패션을 포기하지 않았죠. 1962년 진공 청소기 회사의 견습생이었던 데릭 웨스트우드라는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을 때, 손수 만든 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걸었으니까요. 1965년 이혼하지만, 전 남편의 성이 맘에 들었던 비비안은 '웨스트우드'라는 성을 계속 사용합니다.
1965년 말콤 맥라렌과의 만남은 비비안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라 예술 학교에 다니던 말콤은 반사회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자, 당대의 패션 인플루언서였는데요. 비비안에게 주류 문화에 대한 반권위적인 태도와 이를 표출하는 패션의 힘에 대해 많은 영향력을 끼쳤죠. 1971년 비비안은 말콤과 함께 런던 킹스로드 430번지에 '렛 잇 록(Let it Rock)'이라는, 비주류 문화를 기반으로 한 의류 매장을 오픈하면서 본격적인 패션의 길을 걷게 됩니다.
렛 잇 록은 1972년 제임스 딘에게서 영감을 받아 '살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뜻의 '투 패스트 투 리브, 투 영 투 다이(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로 이름을 변경하며 록 스타일의 아이템을 판매했습니다. 1974년에는 '섹스(SEX)'라는 도발적인 이름으로 다시 바꿔, 성적 페티쉬를 드러내는 본디지 룩을 선보였죠. 이로써 런던에서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패션을 선보였던 펑크(punk) 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됩니다.
펑크의 여왕에서 진정한 패션 디자이너로
펑크 족과의 연계성은 말콤이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라는 전설적인 록 밴드를 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비비안은 섹스 피스톨즈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면서 펑크 룩을 견고히 다지게 되죠. 안전핀, 클립, 배지 등으로 장식한 질 낮은 가죽 소재, 고무 소재의 셔츠, 포르노그래피나 저속한 메세지가 담긴 티셔츠 들은 반항과 무정부주의적 가치를 드러내며 펑크 족의 상징이 됩니다.
킹스로드 430번지는 1976년 '세디셔너리스(Seditionaries)'로 변경되었다가, 1979년 해적선 콘셉트의 '월드 엔드(World’s End)'로 바뀌게 됩니다. 이곳에서 말콤은 음악에, 비비안은 패션 디자인에 더 집중하게 되죠. 또한 디자이너로서 확실한 자의식을 갖게 된 비비안은 1981년 봄, 자신이 심취했던 해적을 모티브로 한 '월드 엔드'라는 이름의 첫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이로써 상업성 있는 디자이너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죠. 이후 북미 인디언에서 영감을 받은 '새비지(Savage)', 페루의 원주민 여성에서 착안한 '버팔로(Buffalo)' 컬렉션을 잇달아 탄생시키며 성공 가도를 달립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졌던 말콤과 비비안은 1983년 결별합니다. 비비안은 이탈리아 출신의 새로운 파트너, 카를로 다마리오를 만나며 이듬해 이탈리아로 거처를 옮기는데요. 1985년 S/S 컬렉션인 '미니 크리니(Mini Crini)'는 비비안이 인정받는 디자이너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속치마인 크리놀린을 재해석해 사이즈를 줄이고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를 접목했으며, 폴카 도트 패턴의 스커트와 브랜드의 상징이 된 플랫폼 슈즈를 매치했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반영한 각진 어깨의 '파워 슈트'가 유행하던 당시에 여성스러움과 도발성이 강조된 미니 크리니 컬렉션은 큰 관심을 얻게 됩니다.
1987년 런던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 컬렉션을 발표하는데요. 영국을 상징하는 소재인 트위드, 트렌치코트의 소재인 개버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니트 등 영국적인 소재들로 컬렉션을 전개했죠. 여기에 여왕의 왕관이나 대관식 망토 등 왕실을 상징하는 요소들을 가미해 전통에 대한 애정과 보수성에 대한 조롱을 동시에 드러냈어요. 1990년대에는 트위드와 타탄 체크 등 브랜드만의 상징적인 요소들이 완성되는 한편, 여전히 반체제적인 메세지와 젠더리스 룩을 통해 그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신념을 담아낸 컬렉션들이 등장했죠.
상징적인 오브(ORB) 로고
1986년에는 전설적인 오브 로고가 탄생합니다. 찰스 왕자를 위한 스웨터를 만들게 되면서 비비안이 고안해 낸 엠블럼인데요. 영국 왕실 모티브를 유지하면서도 비비안다운, 발칙함과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곁들이고자 했죠. 왕실 대관식에 사용되는 보주와 비비안이 천문학 잡지에서 본 토성의 고리를 접목한 것이 바로 지금의 오브 로고입니다.
MZ들 사이에서 꽤나 유행하는 오브 로고 펜던트의 진주 네크리스. 이 목걸이의 탄생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요. 1993년 선보인 '앵글로매니아(Anglomania)' 컬렉션에서 비비안은 진주 액세서리를 대거 선보입니다. 특히 진주 스트랩을 세 겹으로 쌓아 올린 로고 초커가 돋보였는데요,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착용한 목걸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죠. 왕실과 귀족이 애용했던 진주라는 소재를 하층 계급이 누리는 펑크 문화의 여왕인 비비안이 활용했다는 점은 불합리한 계층 구조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진주는 트위드 소재, 타탄 체크와 함께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요소가 되었죠.
1990년대 파격적이었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로고 초커는 Y2K의 유행으로 근사하게 부활했습니다. 두아 리파가 2021년 브릿 어워즈 시상식에서 착용하면서 재조명을 받은 것이죠. 이후 초커는 물론, 진주 네크리스와 오브 로고 펜던트의 실버 및 골드 네크리스 또한 유행템이 되었습니다.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와 2024년 S/S 컬렉션
1992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자신의 제자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25살 연하의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와 결혼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안드레아스는 1988년 빈 응용예술대학교에서 비비안과 처음 만났는데요. 1989년 런던으로 함께 이주하며 1991년 처음으로 합작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안드레아스는 비비안의 숨겨진 조력자로서 충실했습니다. 비비안은 이 공로를 인정해 2016년 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했고, 메인 라인인 골드 레이블을 '안드레아스 크론탈러 포 비비안 웨스트우드'로 새롭게 이름을 붙였죠.
비비안 사망 이후, 안드레아스는 그녀에 대한 오마주를 드러냈습니다. 안드레아스 크론탈러 포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2024년 S/S 컬렉션은 세상을 떠난 비비안이 실제로 입었던 옷을 기반으로 전개되었죠. 펑크 룩으로 가득한 그녀의 옷장을 뒤진 안드레아스는 39가지 룩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헐렁한 수트와 리본이 달린 퍼프 드레스, 다채로운 타탄 체크 등 마치 비비안이 돌아온 듯했죠.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남긴 메세지
비비안은 창조적인 디자이너로서도 명성이 높았지만, 열정적인 사회 운동가로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느끼고, 환경 보호 활동에 앞장섰어요. 2015년에는 셰일 가스 개발에 반대하기 위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관저 앞에 탱크를 몰고가 시위를 벌이는 등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죠. 천연 가스의 일종인 셰일 가스를 추출하기 위해 프래킹(수압파쇄) 공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환경을 파괴한다는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에요.
이외에도 '적게 사고, 오래 입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신념 아래 캠페인을 진행하거나 반 고흐 작품에 음식 테러를 벌인 기후 시위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환경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의견도 거침없이 드러냈던 비비안. 미국의 기밀을 폭로한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거나, 채식주의자로서 스텔라 매카트니와 같은 동물 애호가와 함께 모피 판매를 금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죠. 심지어, 영국 내 모피 판매 금지를 위해 정부에 로비를 할 정도였어요.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점이 MZ세대를 사로잡은 매력이 아니었을까요? 하고 싶은 것은 열정을 다해 완성하고, 편견과 차별 없이 세상을 대하며, 불의에 대해서는 커다란 목소리를 냈던 그녀. 유산과도 같은 비비안의 메세지는 아들 및 손녀와 함께 세운 '비비안 재단'을 통해 끊기지 않게 됐어요. 비영리법인으로서 기후 변화와 전쟁, 인권 등에 초점을 맞춰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비비안의 목소리는 영원할 것입니다.